오멜라스에 대한 단상
내가 오멜라스를 다시 접한 것은 어느날 문득 서점에 들렸을 때였다.
무심히 책 사이를 거닐고 있을 때, 오멜라스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SF와 관계가 있는 이 암호와 같은 글자가 어찌 내 눈에 보였던 것일까?
다시 살펴보니 출판사의 이름이란다.
" 아! SF를 만드는 출판사인 모양이네 !! "
옛날에 읽었단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몇 장 되지 않는 단편이었는데, 집에 가면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읽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내 나이도 어렸고, 단편이라지만 쉬운 내용도 아니었다.
<속죄양에 대한 놀랄만한 통찰력>이라고 해설 부분이 붙어있어서 '아! 그런가?' 하는 정도였다.
지금 읽어도 역시 쉽지가 않았다.
왜 오멜라스의 행복, 아름다움, 지혜, 기술, 그리고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 한 어린아이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일까?
속죄양에 대한 해석론으로 들어가면 나는 더욱 무능해진다. 속죄양이 헤브라이즘 문화와 관계가 있다는 정도만 알 뿐, 속죄양이 그들의 문학과 문화에서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지 모르기에 '속죄양'의 해석으로 나는 오멜라스를 읽을 수가 없었다.
다 읽고서 책장을 덮고는 "다시 읽어봐도 어렵네.."하면서도 그 어린아이가 의미하는 바를 잠시 생각했는데 문득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정의>
나 혼자의 해석이어도 상관없다. 책은 작가를 떠난 후에는 독자의 것이란 핑계로 나만의 해석을 해본다.
"르귄 할머니 미안해요. 할머니가 생각과 다르더라도,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정의를 볼모로 나머지를 가질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사소한(?) 정의를 포기한 대가는 아주 컸다. 그들은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다.
그래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모두들 한번씩은 정의를 방기한 행위가 옳은지 고민하지만,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개에게 던져주는 먹다버린 뼈다귀 정도의 것임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정의를 손에 넣어도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너무 사소할 수도 있고 혹은 자신들이 계약 맺은 바를 훼손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멋진 신세계>에서 말하는 '매독에 걸릴 권리'따위가 그들이 노력하여 얻어낼 수 있는 정의의 크기가 아닐런지 잠시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의에 타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오멜라스를 떠나게 된다. 정의를 찾는 험난한 여행을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정의를 말로서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정의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정의를 상실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